“보직을 맡아 달라는 학교의 요청을 차마 모르는 척할 수가 없더라고요. ‘이왕 맡았는데 열심히 해야지’ 싶다가도 ‘정말 잘한 건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요. 맡겨진 일들을 훌륭히 해낼 수 있을지도 걱정이고, 교육·연구에 투자할 시간이 줄어들 것을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도 큽니다.”
최근 각 대학에서 교수들의 보직 기피 현상이 꾸준히 확산되고 있다. 대학이 교수업적평가를 강화하는 등 연구·교육 실적이 각 교수의 역량을 증명하는 중대 지표로 떠오르면서 대다수 교수가 보직을 원했던 과거 풍조가 급격히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현재 각 대학은 “모두가 기피하니 보직 교수를 선정하는 게 너무 어렵다”, 교수들은 “보직을 맡으면 연구·교육에 공백이 생기게 돼 꺼려진다”며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와 관련, 보직 교수들은 “보직은 명예직이 아니라 봉사직이다. 교수 스스로가 대학 성장·발전이라는 대의를 위해 개인을 희생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며 교수들의 의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더불어 보직에 대한 교수들의 부담·우려를 완화하기 위해 각 대학이 실질적 제도 개선·지원책 마련에 힘써야 한다는 충고도 많다.
■보직 원하는 교수 ‘가뭄에 콩’ … 대학본부 “너무 어렵다” 대학에서 교수들이 보직을 맡게 되는 주된 경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스스로 원해 오르는 경우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보직 교수로 일해 달라”는 대학의 요청을 수락한 경우다. 그런데 대다수 교수들이 보직을 희망했던 지난날과 달리, 요즘은 스스로 자처해 보직을 담당하는 일이 드물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대학 본부가 수차례 설득을 거듭해 보직을 맡기는 사례도 부지기수다. 대학 입장에서는 인사철마다 보직 교수 선정으로 속을 끓여야 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올해 초 인사이동을 진행한 모 지방 국립대 기획처장은 “우리 대학은 비교적 규모가 크고 교수 수도 많은 편임에도 최근 본부에서 보직 교수를 정하는 데 무척 애를 먹었다. 대학은 사심 없이 열심히 일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다들 연구실로 꼭꼭 숨어버리니 찾기가 쉽지 않고, 찾더라도 보직을 한사코 거부하는 교수가 대다수”라며 “총장·부총장·보직교수 등이 수차례 찾아가고 만나 설득해야 겨우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다. 이해는 되지만 대학으로서는 답답하고 기운 빠질 때가 많은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모 지방 사립대 부처장 역시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상당 수 교수들이 보직을 맡으려고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100% 변했다”며 “물론 보직을 맡겠다는 교수가 많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행정적으로 조직을 이끌어 갈 일꾼이 없다면 결국 대학 발전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학내 현안 처리에 연구·교육은 ‘그림의 떡’ 이 같은 대학의 어려움을 모르진 않지만 교수들에게도 보직을 기피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된 이유는 보직을 맡으면 대학 행정에 모든 시간을 쏟아 부어야 해 연구·교육에는 손을 댈 틈조차 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실제로 현재 보직을 담당하고 있는 대다수 교수들은 매일 아침 이른 시간부터 밤늦게까지 학내 행정 업무에만 매달려도 하루가 모자란 실정이다.
박충년 전남대 교무처장은 “아침 일찍 출근해 회의, 결재, 계획수립·검토 등을 진행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훌쩍 지나가 있다. 다른 보직 교수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학내 현안에 대해 상세히 알 수 있다는 점은 보직의 큰 장점이다. 하지만 너무 바빠서 학생들에게 전처럼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없다는 점, 개인 생활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는 점 등은 아쉬운 게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임기 중 생긴 교육·학문에 대한 공백이 교육자·학자로서의 페이스를 잃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리더로서 감내해야 하는 심리적 어려움에 대한 부담 등도 크다. 수도권 모 대학에서 10여 년간 기획처장·교무처장을 맡았던 한 교수는 “학교측의 권유로 오랫동안 처장으로 일하면서 연구·교육에 몰입하지 못하는 등 학자·교수로서의 본연에 충실할 수 없어 늘 마음 한쪽이 무거웠다”며 “보직을 내려놓은 뒤 학생들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이제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러나 연구는 때와 흐름이 있는 법이라 한 번 놓치고 나니 돌이키기가 쉽지 않다”고 밝혔다.
또 조기조 경남대 기획처장은 “대학 간 생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보직 교수들이 느끼는 심리적 어려움도 점점 커지고 있다”며 “보직 교수로서 학교의 발전·성장을 가속화할 최선의 대안을 내놓을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는데 뾰족한 수가 없으니 괴로울 때가 많다. 경쟁이란 피를 말린다”고 속사정을 털어놨다.
이외에도 교수들은 △구성원 간 의견 조율의 어려움 △총장 출마 가능성에 대한 학내 비난 △중립·공식적 태도 정립의 곤란함 등을 보직을 망설이게 만드는 요인으로 꼽았다.
■교수는 인식 전환, 대학은 제도 개선 거듭해야 교수들의 보직 기피 현상이 심각해지자 학내외에서는 이를 완화·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대책들이 모색되고 있다. 특히 전·현직 보직 교수들은 “보직은 대학을 위해 봉사·희생하는 자리다. ‘우리 대학을 위해 개인적인 부분들은 일정 기간 접을 수도 있다’는 인식이 교수들 사이에 확산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실제로 현재 대다수 보직 교수들은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재임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모 서울사립대 교무처장은 “교수에겐 대학이 직장이다. 그동안 좋은 여건 속에서 연구·교육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 주고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게 해 준 직장에 대한 고마움을 갚고 싶어 처장직을 맡았다”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보직을 꺼렸었지만 봉사·희생한다는 마음으로 즐겁게 일하니 그만큼 보람도 크다”고 밝혔다.
또 광운대 교무연구처장·기획처장·대외협력처장 등을 지낸 권태한 교수는 “교수가 보직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전체를 위해 개인적인 것을 희생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벼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보직 교수들은 학교를 위해 짐을 나눠 가진다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다”며 “특히 최근 대학 간 경쟁이 가열되고 있고 대학의 변화에 대한 사회적 요구도 상당히 강하다. 이제 보직 교수들은 봉사·희생정신에 더해 도전적·진취적인 태도도 함께 가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개개인의 인식 전환과 함께 대학은 △직원 역할 확대 △제도 개선 등을 통해 업무 효율을 높이고 보직 교수들이 겪는 어려움을 완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지난해 ‘보직 교수의 역할과 능력 및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논문을 낸 이석열 남서울대 교육개발센터 소장은 “능력 있는 전문 행정직원들을 양성해 보직을 맡기는 분위기가 계속해서 확산돼야 한다”며 “대학 내 직무 영역을 명확히 나눠 교육·연구와 관련된 것은 교수, 경영·행정과 관련된 것은 직원이 주축을 이루도록 한다면 업무 효율 제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보직을 맡는 직원이 늘어나면 대학 행정에 대한 교수들의 부담도 한층 줄어들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이 소장은 “현재 외국 대학에서는 교수들이 보직트랙과, 연구·교육트랙을 선택할 수 있는 제도가 속속 마련되고 있다. 교수들의 보직 기피 현상 완화와 전문성 강화를 위해 우리 대학들도 트랙 제도를 도입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 볼 필요성이 있다”며 “더불어 보직 교수들의 전문성 제고를 도울 맞춤형 연수·교육프로그램 등도 마련·시행돼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