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학계는 각종 학술대회를 열어 과거 한일 양국의 식민지배 역사와 미래에 대해 논의했다. 대학가에서도 한일 대학생들 간 교류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 양국 학술행사, 대학생 간 교류 ‘다채’
지난 5월 한국과 일본 지식인 200여명은 ‘한일강제병합 조약은 무효’라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김영호 유한대학 총장, 이태진 서울대 교수, 강만길 고려대 교수, 이장희 한국외대 교수 등 학계 인사와 고은·김지하 시인, 박원순 변호사 등이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김영호 총장은 “한일강제병합 조약에 대한 한국측 해석에 ‘불법’이라는 표현을 넣었다. ‘사실상 불법’을 강조할 수 있는 내용을 다수 포함했고 그만큼 양국 학자들이 노력했다”고 밝혔다.
강제병합100년공동행동 한일실행위원회(이하 한일실행위원회)는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관련 행사를 개최했다. 올해 1월과 3월에 각각 일본실행위원회와 한국실행위원회를 결성했다. 지난 12일에는 ‘한일시민대회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장희 교수(한국실행위원회 상임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의한 각종 피해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 구제를 위한 일본정부의 관련법 제정을 촉구한다”며 “반드시 일본정부가 진실한 사과와 손해 보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2일 도쿄에서 한일시민공동선언 일본대회가 열린 데 이어 27일에는 한국에서 개최됐다.
동북아 역사재단(이사장 정재정)은 학술회의와 한일대학생 교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프로그램에 참가한 한일 대학생 20명은 지난 16일부터 22일까지 양국 관계를 상징하는 역사유적지를 답사했다. 교토를 시작으로 후쿠야마, 시모노세키를 방문했고 이어서 부산의 초량왜관, 포항제철, 화성 제암리 등을 돌아봤다.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뱃길에서 ‘한일간 강제병합에 대한 인식차이’ 등을 주제로 선상 토론을 하기도 했다. 일본 대학생들은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역사를 구체적으로 배웠을 뿐 아니라 새로이 알게 된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일본의 한 교과서 회사에 취직한 오하시 오시히로 씨는 “이번 역사체험을 통해서 경험한 것들을 살려 일본 역사교육 개선에 힘쓰고 싶다”고 밝혔다. 마츠모토 에리 씨는 “3.1운동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이런 잔혹한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다”며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고 소감을 전했다. 야마다 아야코 씨도 “역사 인식 차이를 해소하는 것은 서로의 생각을 전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시작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한양대생 이정욱 씨는 한일관계에 관심이 많아 프로그램에 참여한 케이스. 이 씨는 양국의 역사교육이 달라 역사 인식에 대한 차이가 컸다고 전했다. 우리나라는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를 강조하는데 일본에서는 단편적으로만 언급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도 대학생간 교류가 많아야 한다. 인식 차이를 확인하며 서로 이해하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또한 동북아 역사재단은 지난 24~26일 3일에 걸쳐서 국제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1910년 한국강제병합, 그 역사와 과제’라는 주제로 열린 이 학술회의에는 6개국 총 33명의 국제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일본의 한국병합 과정’ , ‘동아시아 식민주의와 일본’, ‘역사인식과 동아시아의 미래’에 대해서 주제 발표와 종합 토론이 이뤄졌다.
26일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병합조약의 불법성에 대해서 발표했다. “양국의 비준이 없는 조약으로 국권이 이양된다는 것은 국제조약 역사상 유래가 없다”고 주장했다. 일본 도스카 에쓰로 박사도 병합조약의 기초가 된 을사보호조약이 대한제국의 법적 비준 절차를 거치지 않았으므로 국제법상 무효라고 말했다.
개별 대학간 교류도 눈에 띈다. 한남대는 일본 시코쿠학원대학 학생들과 교류의 시간을 가졌다. 30년 이상 활발한 교류를 펼쳐온 두 학교는 지난 9일 한남대에서 한일 국제학생세미나를 열었다. 시코쿠학원대학에서 12명이 참가해 ‘일본 민요의 변화와 계승’을 주제로 발표했으며, 훗카이도 민요 중 하나인 ‘소란부시’를 시연했다.
한남대생들은 ‘한일 엔터테인먼트 교류’를 주제로 발표했다. 양국의 대표적 드라마·영화·가수·애니메이션을 비교하며 한류와 일류에 대해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발표자 홍성준, 엄태호 씨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한국과 일본은 원정16강 진출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이와 같이 두 나라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도 협력이 필요하다”며 “대학생들부터 자국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다른 나라 문화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10일부터 일본 학생들은 한국요리 만들기, 백제 유적 및 부여박물관 견학, 독립기념관 방문 등 한국문화체험 행사를 가진 뒤 15일 귀국했다. 이와 관련, 김형태 한남대 총장은 “30년이 넘도록 한남대와 시코쿠학원대학이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며 “한일 양국간 대학교류의 모델이 될 만하다”고 기대했다.
■ 간 나오토 총리 발언, “교수들 이성적 대처” 목소리
간 나오토 일본 총리는 “식민지 지배가 가져온 많은 손해와 고통에 대해 다시 한 번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의 기분을 표명한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기존에는 1995년 무라야마 당시 일본총리 담화가 가장 진일보한 일본수상의 사과표현으로 평가됐다.
교수들은 이 부분에서 조금씩 다른 견해를 보였다. 일본의 변화를 긍정적 시각에서
별다른 변화가 없는 시각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했다.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상훈 한국외대 교수는 “이전 1995년 무라야마 총리 담화나 2005년 고이즈미 총리 담화와 다른 면이 보인다. 3.1 독립운동에 대한 언급이나 식민지 지배의 강제성을 인정한 점은 새로운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고 밝혔다. 민주당 정권이 과거 자민당 정권보다는 한일관계에 대해 우호적이란 의견이다.
일본측의 발언이 약간 진전이 있었지만 미흡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최원식 인하대 교수믐 “미흡한 점은 있지만 일단 진전된 것으로 본다. 불법성을 인정하는 담화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다. 간접적 시인이지만 무라야마 수상의 담화보다는 낫다는 생각”이라며 만족스럽지 않지만 일본 정부에서도 성의를 보였다고 언급했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도 “진보라고 보기에는 좀 미흡하다. 말꼬리 잡는 걸 수 있지만 ‘한국인이 원하지 않는 병합’ 이라는 표현이 있다. 그 원하지 않는 게 바로 폭력이고 불법이다. 화두만 꺼내고 성급히 닫은 느낌”이라고 평했다. 이 교수는 불법이라고 명시했을 때 일본 정부의 부담이 있기 때문에 어정쩡한 자세를 취한 것 같다고 했다.
한철호 동국대 교수는 “일단 사과했고 지난번보다는 진보했다고 본다. 다만 진정성이 나타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합법성을 전제했는데 이걸 부정하지는 않아서 미흡한 점 있다. 여러 불행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에 대한 사과가 없었다”고 밝혔다.
일본측의 발언이 별다른 변화가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장희 한국외대 교수는 “일본 정부는 과거사 문제에 대한 근본적 변화가 없다. 간 나오토 총리 담화 초기의 ‘한국인의 의사에 반하여’란 문구가 강제성을 인정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란 의견을 제시했다. 1965년 한일 정상화 조약으로 과거사를 잘 마무리한 기조를 섣불리 건드리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한일 양국의 발전적 미래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됐다.
교수들은 아직까지도 한일 양국의 역사에서 핵심쟁점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단기간에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다만 일본도 조금씩 변하고 있으며,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이상훈 교수는 “지한파·친한파 일본 인사들과 관계를 공고히 해야 한다”며 현실적 네트워크 형성을 강조했고, 한철호 교수는 “진정성 있는 사과는 물론, 독일 수준의 국가적·개인적 배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원식 교수는 “유연한 대처로 일본 측도 사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전망했다.
지식인들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장희 교수는 “지식인들이 진정성 있고 올바른 여론을 형성해야 한다”고 되풀이 강조했고, 이태진 교수도 “정치인들이 정치 논리에 의해 망언을 하는 경우가 많다. 지식인들이 올바른 역사를 일반 국민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