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대학 출신이어서 사업하는데 불편하다거나 한 적은 없어요. 제 관심분야인 치기공을 어떻게 더 배울까 하는 생각만 했습니다. 학사학위,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시간을 들이느니 원서 한 번 더 보고, 신기술을 연마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대한민국은 학벌 공화국이다. 이런 나라에서 4년제도 아닌 전문대학 출신자에 대한 차별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정연호 서울치과기공소 대표
<사진>는 이런 선입견과 편견 속에서 실력과 기술만으로 당당히 성공한 사업가다.
정 대표는 1988년 당시 김천보건전문대학(현 김천대, 2009년 7월에 4년제 대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음) 치기공과에 진학했다. 이유는 ‘돈을 잘 벌수 있다’는 부모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1990년 치기공과를 졸업한 후 1992년 지금의 서울치과기공소를 세웠다. 당시 종업원은 정 대표와 친구 한명. 20년 남짓 흐른 지금, 기공소는 본점의 한해 매출만 19억원에 달하며 종업원도 35명이나 된다. 프랜차이즈 형태로 운영하고 있는 5군데의 기공소까지 더하면 종업원은 80명을 훌쩍 넘는다.
“당시 기공소들은 대부분 5인 이하의 소형 사업체 위주였습니다. 저는 주위 사람들에게 대형 치과기공소로 발전시키겠다고 말했지만 주위의 반응은 냉랭했죠. ‘전문대학 출신이 하면 얼마나 하겠어’라는 편견이 저를 ‘기술’에 더욱 집중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기공소와 차별화 되려면 남들이 하지 않는 기술을 습득하는 방법밖에는 없었으니까요.”
설측교정(교정장치를 치아 안쪽으로 부착해 치아를 교정하는 치료방법)이라는 새로운 교정 법을 우연히 듣게 된 정 대표는 미국과 일본을 오고가며 전문가를 만나고 물어도 봤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자신들의 기술을 그렇게 쉽게 알려줄리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2년 이상 고민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설측교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1998년에 IMF가 찾아왔는데 저희 기공소는 오히려 호황을 맞았습니다. 설측교정은 일반 기공보다 가격이 30%정도 비싸지만 치아 보정을 위한 브라켓(교정용 철사)이 외부로 노출되지 않아 젊은 여성환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경제 상황이 나빠 보정 시술이 줄어들자 의사들은 구매력 있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좀 더 단가가 높은 설측교정을 많이 권유했고, 덩달아 저희 기공소도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어 단어를 하나하나 찾으면서 외국서적을 읽고, 치과의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이론을 공부하고, 미국과 일본의 전문가를 찾아다니면서 기술 연마에 몰두했던 정 대표의 끈기와 노력은 2인으로 시작한 기공소를 단숨에 성장시켜 현재의 모습으로 탈바꿈시켰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치기공과 때문에 더 이상 치기공 분야의 전망이 없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졸업 후 인턴과정이 필요한 학생들은 넘쳐나지만, 3년 이상의 중견 기공사들은 여전히 모자란다는 것이다.
“저는 후배들에게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보다 절박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본적인 치기공 기술을 익히려면 최소 3년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요새 친구들의 절반 이상은 1년이 못 되서 그만두거나 다른 회사로 이직합니다. 절박함이 부족해서 그런 거지요. 저는 명문대를 나왔던 전문대학을 나왔던 상관없이 자기안의 절박함이 있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 대표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불쑥 명함을 가리킨다. 명함에는 서울치과기공소라는 이름아래 ‘I.O.Lab’이라는 영문 회사명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기 위해 발음하기 어려운 서울치과기공사라는 이름 대신 지은 영문 회사명이라는 설명이 뒤따른다.
“10년 전에는 기술을 배우러 갔지만 이제는 기술을 전수하고 제품을 팔 수 있을 만큼 우리나라 치기공 기술은 이미 세계 수준으로 올라왔습니다. 미국·독일·스위스 등 선진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구매력 있는 소비자들도 모두 우리의 고객이 될 수 있습니다. 시장이 좁다고 불평만 늘어놓기 보다는 언어를 배우고, 준비하고, 과감히 도전한다면 치기공의 미래는 밝다고 생각합니다.”
<사진: 한명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