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성희롱 문제로 고민하던 서울 한 사립대에 다니는 중국인 유학생 A씨는 오랜 고민 끝에 교내 성폭력 상담실에 전화를 걸었다. 상담받기 전부터 한국어로 상담내용을 수차례 연습했지만 막상 민감한 주제를 꺼내니 중국어가 먼저 나왔다. 하지만 중국어로 의사소통을 할 상담가는 없었고, A씨는 “짧은 한국말로 상담을 했다가 왜곡될까 두려워 상담을 포기했다”고 토로했다.
교수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던 지역 국립대 중국인 유학생 B씨는 그간 어디에 먼저 신고해야할지 몰라 끙끙 앓았다고 했다. 한국인 친구에게 부탁해 성폭력 상담실에 상담을 요청했지만, “문화의 차이 때문에 벌어진 일 같다. 이해하라”라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B씨는 성적수치심을 느꼈지만 또 문화의 차이라는 답변만 들을 것 같아 다시 상담소의 문을 두드리기 어렵다고 했다.
대학가에 외국인 유학생 관련 성희롱·성추행 사건이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지만, 학내 성폭력 상담실은 이에 속수무책인 것으로 드러났다. 국내 외국인 유학생 숫자가 8만명에 달하고 있지만, 이들을 상담할 전문상담가는 물론 예방교육조차 실시하지 않아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외국인 학생 8만여명…성 문제에 무방비 = 교육과학기술부 ‘외국인 유학생 통계’자료에 따르면 국내 대학의 외국인 유학생 숫자는 2009년 기준으로 7만 5850명에 달한다. 2006년 3만여명에서 매년 그 수가 급증해 올해는 8만여명 이상의 유학생들이 대학에 재학 중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외국인 유학생 숫자가 늘면서 이들이 성희롱·성추행 문제를 호소하는 사례도 종종 나타나고 있다. 최근 1년간 충남대에서만 두 명의 교수가 외국인 유학생을 성희롱·성추행한 혐의로 해임됐다. 지난해 10월 경희대에서도 교수가 외국인 여학생을 성폭행한 의혹을 받아 해임된 바 있다. 이외에도 대학 내의 외국인 유학생들에 관한 성추행 문제는 2007년 한 토크쇼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일본인 유학생이 대학에서 성희롱을 당했다고 폭로하며 공론화 된 바 있다.
하지만 이 같은 피해가 발생해도 외국인 유학생들이 성폭력 상담실을 방문, 상담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드물다. 경희대 성폭력 상담실은 최근 1년간 외국인 유학생 상담 건수가 한 건도 없었다. 성폭력상담실을 운영하는 건국대와 성균관대는 외국인 유학생들의 상담 건수가 드물게 접수되고 있다고 밝혔다.
결국 대학 내 성폭력 상담실이 유학생에게는 유명무실한 셈이다. 한 성폭력 상담실 관계자는“아직까지 유학생 신고 접수를 받아 본 적이 없다”며 “유학생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인지, 성폭력 상담실이 있는지를 모르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올해부터 성폭력 상담실에 대해 홍보를 강화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 언어·문화차이로 성상담 고충…전문상담가 없어 = 이에 실제 외국인 유학생 성 관련 문제가 발생한 충남대는 뒤늦게 수습에 나섰다. 현재 외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한 성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교내 국제교류원과 협의 중이다. 또한 영문으로 성폭력 상담실 정보를 홍보하고 성 문제 예방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충남대 성폭력 상담실 이미정 상담가는 “외국인 유학생들의 성 문제와 관련해 곤란한 일을 겪어도 상담받을 곳이 있다는 것 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올해부터 성폭력 상담실에 대한 팜플렛을 영문으로 배포하고, 관련 안내나 교육을 통해 성 관련 문제를 예방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외국인 유학생들이 성폭력상담실을 찾아가도 언어의 장벽에 부딪히거나 서로 다른 문화차이로 제대로 상담 받지 못하는 경우도 문제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외국인 유학생이 재학 중인 것으로 알려진 선문대 성폭력 상담실에는 외국인 전문 상담가가 한 명도 없다.
선문대 성폭력 상담실 관계자는 “언어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은 교내 유학생 교육원을 통해 상담받을 수 있다”며 "필요한 경우 각국의 언어가 가능한 상담가들이 성폭력 상담실을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립대인 충북대와 충남대에도 외국인 전문 상담가는 없었고, 건국대와 성균관대가 중국인 유학생들을 위한 중국인 상담가를 일부 두고 있었다.
건국대 학생상담센터 허재경 전임상담원은 “학내 재학 중인 유학생 중 중국인이 90%정도”라며 “이들을 위해 상담심리를 전공하는 중국인 대학원생 2명을 또래 상담가로 운영 중”이라고 말했다. 성균관대 성폭력 상담실 관계자도 “중국말로 상담을 할 수 있는 외국인 멘토 2명을 두고 있다”며 “개인상담을 원하는 중국인 학생들은 멘토를 통해 상담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 다문화 학생들 위한 전문 상담 마련 시급 = 그러나 대학 내 성폭력 상담실의 외국인 상담가 숫자도 극히 드물뿐만 아니라 중국인 유학생만을 대상으로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점차 다국적, 다문화 학생들이 늘어나는 만큼 이들을 위한 성교육과 전문 성폭력상담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건국대 허재경 전임상담원은 “외국인 유학생들도 똑같이 등록금을 내는 학생들이다. 대학들이 당연히 이들의 복지에 신경을 써야 한다”며 “실제 작년부터 재외국인 상담가가 유학생들을 상대로 상담을 진행하자 호응이 좋았다. 앞으로 이들을 위한 외국인 상담가를 점차 늘려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충남대 이미정 상담가도 “똑 같은 성관련 문제가 발생해도 유학생은 문화의 차이, 언어 등에서 더 큰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며 “점차 대학 내 외국인 학생 숫자가 늘어나고 있어 다문화 학생들을 위한 상담가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