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학신문에서 연재하는 칼럼입니다.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아까운 돈을 내고 책을 사놓고서도 게을러서 그것을 차일피일하며 읽지 않는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흥미진진한 탐정물이나 에로물이라고 해도 힘들고 지루할 때가 많다. 내 개인의 평생 실적을 평균하건대 책을 사 놓고 그 가운데 실제로 읽은 것은 페이지수로 20%에 채 못 미치는 것으로 추산된다.
교육의‘가르칠 교’(敎)자의 왼 쪽은‘효도 효’자이고 바른 쪽은‘칠 복’자다. 효(孝)자는 다시 ‘본 받을 효’(爻)자와‘아들 자’(子)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 효자(孝子)는 본 받는 아이 또는 배우는 아이라는 뜻이다. 집안으로 치면 부모를 본 받는 아이, 공동체로 치면 문화적 질서, 기술, 가치를 본받고 배우는 아이가 바로 효자다. 효도란 것은 곧 배우기 그것이다.
‘배움’옆에 매를 세워 놓은 것이 가르치는 일이다. 자식의 배우는 것이 미흡해서 이를 보충하는 것이 가르침이다. 가르치기 위해서는 매로 치는 것도 불사하는 것이 교육이다. 가르치는 것은 물론 처음에는 부모의 일이었다. 그 후에는 부모와 공동체의 합작 사업으로 넘어 갔다. 그렇게 되면서 전문적인 교사가 생겨났을 것이다.
농업시대의 농사꾼 집안에서는 농사 기술을 배우고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그 수확물로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이었다. 근면, 정직, 화형제(和兄弟), 낙처자(樂妻子)의 가치를 배워 실천하는 자식이라야 부모를 공경하는 효자인 것이다.
질서를 어기거나 죄를 범함으로써 지탄이나 처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본받는 것이 효다.
소학에서 공자는 제자인 증자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 준다. ‘부모가 준 몸을 다치지 않는 것이 효의 첫 단계다. 입신양명하는 것은 효의 최고 단계다’ 다치지 않는다는 것은 살아 남기를 말한다. 입신양명 한다는 것은 어느 분야에선가 지도적 지위를 획득했음을 뜻한다.
생물의 가장 큰 본능적 욕망은 번식이라고 알려져 있다. 새끼를 번식시켜도 그것이 살아 남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생존해서 성장해야 다시 번식 싸이클을 밟을 수 있다. 배움이란 첫째로 살아 남기를 배우는 것이고 가르침도 첫째로 살아 남기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우기와 가르치기는 생식 행위의 매우 자연스러운 문화적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배우기는 나아가서 씨족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 들여지는 것, 더 나아가서는 존경 받는 구성원이 되는 것에 목적이 있다.
받아 들여지기는 소극적인 권력이고 존경 받는 것은 적극적인 권력, 즉 지도자적 권력이다. 효는 소극적으로는 자연과 공동체의 질서에 순응하여 살아 남기를 배우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지도력(권력)에 참가하는 것이다. 입신양명은 이런 지도력의 결과다.
배움의 가장 순수한 동기는 호기심이다. ‘무엇’, ‘왜’, ‘어떻게 하면’이런 의문이 호기심의 본질이다. 이 호기심을 대신하는 것이 순종이다. 호기심이나 순종심의 결여나 실패를 보충하는 것이 가르침과 매질이다. 호기심, 순종, 가르치기를 따라서 배우고 생각하다 보면 지식이 쌓인다.
지식이 많이 쌓이면 권력이 되는 수가 있다. ‘아는 것이 힘이다’.
힘을 가지기 위해 배우는 사람은 아름답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현명하다. 자식을 가르치려는 부모의 목적은 절대적 대부분이 아는 것이 주는 힘과 관계가 있다. 살아 남는 힘, 지도자가 되는 힘 말이다. 따라서 부모건, 학생이건, 교사건 교육의 목적을 이런 능력의 형성에 두는 것은 현명하다.
오로지 호기심 때문에 정성을 다해 배우고 생각하기를 끝까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자유인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천재는 이런 사람들 속에서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