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학신문에서 연재하는 칼럼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답을 내 놓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학문(學問)이라고 부른다. 이것처럼 어려운 역할은 없을 것이다. 대학은 사회와 세계의 이성(理性)이다.
한국의 대학이 제 할 일은 못 하고 있는 까닭은 그 역할이 속성상 이렇듯 최고의 난도(難度)를 가지고 있는데 반하여 그 역사는 턱 없이 짧기 때문일 것이다. 피터 드러커는 그의 최근 저서 <넥스트 소사이어티>에서 해방 직후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한국의 장래를 예측하기 위하여 그가 방한(訪韓)했을 때 당시 한국인으로서 대학 교수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한국은 장래가 없는 나라라고 결론을 내리고 그렇게 보고했다는 것이다. 이런 여건에서 50여년 전에 우리 나라의 대학들은 태어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던 한국이 경제에서 이만큼 발전한 것은 당시에 자신은 꿈도 꿀 수 없던 기적이라고 드러커는 말한다.
그렇다면 경제에 비하여 학문은 성취하기가 훨씬 어려운 분야인 것 같다. 한국에 대학이 오늘 날처럼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학 입학과 졸업이라는 간판의 수요와 공급이 확대되어 온 데에 있다. 양이 쌓이면 언젠가는 질을 창조한다는 말이 있다. 한국의 대학에 대해서도 이 말이 적중할 때가 올 것이다.
이 시대의 인간과 사회에는 새로운 근본적 문제들이 첩첩이 쌓이고 있다. 도덕의 문제, 지식의 문제, 전략의 문제 등 그 범주도 매우 다양하다. 예컨대 사람을 복제(cloning)해도 괜찮은가. 안 되면 왜 안 되는가. 괜찮으면 어디까지 괜찮은가. 그 까닭은 무엇인가.
오늘 날 도덕의 문제는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적 지식의 문제와 깊이 서로 꼬여 있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인간 복제의 문제는 생물학의 문제와 서로 꼬여 있다. 마치 DNA의 이중나선(二重螺旋)처럼 도덕과 지식은 쌍을 이루어야 비로소 온전할 때가 많다.
나는 며칠 전 큰 길 가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한 수퍼 마켓 입구에서 확성기로 틀어 놓은 여자 가수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 있는 음반 노래를 들었다. "오빠, 오늘 저녁 나를 가져 줘!" 그 노래는 노골적으로 절규하는 섹스 행위의 간청이었다.
이런 노래를 들으면 불쾌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음악은 흡연과 비슷한 데가 있다. 담배를 피울 자유를 구속할 수는 없다. 그들은 돈을 내고 담배를 산다. 그러나 그들은 담배 냄새와 연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그 불쾌함을 참으라고 강요할 권리는 없다.
정보 기술과 생물학의 발전은 지식과 도덕이 결부된 새로운 문제를 양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래 된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하고 있다. 문제를 간추려 정리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근본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지 못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세계와 사회는 카오스에 빠져 들고 있다. 도덕과 지식의 카오스 말이다.]
한국 사회에는 다른 데와는 달리 남북 통일 문제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추가적으로 중첩되어 있다. 통일은 한국에서는 하나의 종교로 되어 있다. 종교는 이성에 의하여 비판되고 의심 받는 것을 거부한다. 비판 대신에 이성이 종교를 설명하는 것을 우리는 신학이라고 부른다.
너무도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한국의 대학은 통일을 종교가 아니라 이성의 문제로서 정리하고 그에 대한 답안을 작성하는 왕성한 연구와 토론에 들어 가야 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소박한 찬송가는 좋다. 그러나 이런 찬송가만 부르고 있는 것은 대학이 할 일이 아니다.
민족, 국가, 평화, 자유, 번영 등 생존의 조건과 가치의 불빛으로써 통일 자체를 비추어 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 할 때는 통일은 신성한 것이 아닌 미신으로 남아 있게 되고 대학은 학문의 전당 아닌 가엾은 학위 공장으로 계속 남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은 확대 재생산된 냉전의 카오스 속으로 재돌입하여 있게 될 것이다.
강 위 석 월간 에머지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