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학신문에서 연재하는 칼럼입니다.
현실주의자도 사람이다. 지식이 늘고 감정이 깊어지면서 남을 사랑할 줄 알게 된다. 개인의 삶의 상대자로서, 또는 환경으로서의 남 말이다. 자신을 남 가운데 하나로 객관화 할 줄도 알게 된다.
민족은 개인에게 매우 중요한 환경이다. 특히 문화적인 면에서 그렇다. 가족이든, 이웃이나 민족이든 그 공동체를 가장 잘 사랑하는 사람은 그 문화를 사랑함을 통해서다. 사유재산제도가 아무리 강조되더라도 사유화가 불가능한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 공동체의 문화다. 예컨대 한국어나 한국인의 된장찌개 좋아하는 입맛을 그 누구도 사유화할 도리는 없다. 진정한 의미의 공공재(公共財)가 있다면 그것은 공동체의 문화라고 말할 수 있다.
정치와 경제에서는 민족은 중요한 환경이 아니다. 특히 21세기처럼 정치, 경제, 문화가 각기 독립적인 축을 형성하게 된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정치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 또는 돈 벌 기회를 잡기 위해서 사람들은 문화적 환경을 희생하기도 한다. 이민을 떠나는 것이다.
사람들이 다른 문화에 동화(同化)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상하이에 KF 치킨 집과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가 번창하고, 반미감정에 끓고 있다는 이라크 청년들 마저 미국 영화에 심취하는 것을 보면 다른 문화에 동화되는 것에 그리 긴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다. 문화는 후천적이고 피는 유전적이다. 유태 민족을 문화가 아닌 유전자에 의해서 제외하려던 것이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었다.
국가라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정치적'이고 인위적인 공동체다. 민족이라는 것은 '문화적'이며 자생적(自生的)인 공동체다. 그 중심 논리가 서로 다르다. 이 둘을 중첩한 '국가민족주의'에 따른 '민족 국가'가 그 수립과 가동에서 이로움과 해로움 가운데 어느 쪽을 더 크게 끼치는지는 따져 보아야 할 일일 것이다. 다만 문화적 동질성 때문에 자생적으로 한 민족이 한 국가를 이루게 된다면 그것은 막을 필요도, 막을 수도 없을 것이다.
국가민족주의는 안으로는 개인보다 민족이 우선한다는 것을 강요한다. 민족이 있기에 개인이 있다는 것이다. 집단주의와 전체주의에 이르고 만다. 밖으로는 다른 민족은 나쁘고 자기네 민족만이 선하다는 독선주의에 빠진다. 그래서 정치와 경제도 함께 국가민족주의로 빠지게 한다. 오히려 민족이 가진 가장 본질적이 특질인 문화는 정치의 시녀와 도구로 밀쳐지는 것이 예사다.
국가민족주의는 유럽 열강의 식민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았던 아시아 아프리카 민족들 사이에 확고하게 퍼졌다. 침략적 민족주의인 식민 제국주의가 남긴 가장 큰 해악은 그것이 직접 자행했던 억압과 수탈이 아니다. 피지배자들 자신이 전체주의와 배타주의의 다른 이름으로서의 민족주의에 스스로 빠지고 말았다는 점이다. 오늘날 북한이나 이라크의 민족주의가 그 전형적인 예다.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에는 개인의 자유를 평등하게 보장하는 법률이 필요하고, 이 법률을 강제 시행할 수 있는 국가가 필요하다.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위하여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문명한 개인들이 발견한 진리다. 이 자유의 원칙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제도가 민주주의다. 국가는 민족과 일치할 필요가 없다. 여러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룰 수도 있고, 한 민족이 여러 국가를 이룰 수도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민족주의는 문화적이기와 민주적이기를 거부하는 국가주의(statism)다. 게다가 그 배후에는 국가주의보다 더 전제적이고 독재적인 특정 정권의 영구집권 음모가 반드시 있어 왔다. 히틀러, 사담후세인, 김일성-김정일 권력 세습 부자가 그렇다. 그들은 자기네 독재 권력을 유지 강화하기 위하여 그 속에 이상주의자들의 공동체적 정열을 쉽사리 담을 수 있는 사회주의, 민족주의를 부르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