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학신문에서 연재하는 칼럼입니다.
불공을 드리는 단계에서는 아무도 정의를 문제 삼지 않는다. '왜 불공을 정의롭게 드리지 않는가'라고 질책하는 노장스님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불공에는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진실하게 드리는가 만이 기준이 될 것이다. 정의는 잿밥을 나눠 먹는 단계에서 기준이 된다.
아수라는 본래 정의라는 뜻의 범어라고 한다. 공평성이니 평등이니 하는 것은 각 사람의 욕망과 주관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무수한 정의가 있게 된다. 자기 맘에 들지 않는 것이 불공평이고 불평등이 된다. 각자의 정의를 끝까지 지키려면 싸움 지옥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아수라장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정의는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한대로 가진다'이다. 이 표어가 울린 사람의 심금과 앞으로 울릴 사람의 심금은 셀 수 없이 많다. 불행이 있다면 능력대로 일하라고 하면 전부 놀려고 들 것이고 필요한대로 가져 가라면 다른 사람은 가져 갈 것이 남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에게는 생산 노르마 노동과 지시적 분배를 강제에 의해 실시하는 전제 정치 만이 선택으로 남게 되었다. 자유시장경제의 정의는 자기가 생산한 것만 가진다는 것이다. 이 정의에 환호작약(歡呼雀躍)할 이유는 누구에게도 없을 것이다. 다만 밋밋한 상식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사람들이 각자 생산한 것을 서로 교환하는 자유가 고무된다. 이 교환이 요술을 부렸다. 시장을 만든 것이다. 시장은 자꾸 번성하고 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일 수록, 그리고 부지런하고 재간이 있는 사람일 수록 엄청나게 질 좋은 물건을 엄청나게 많이 생산하게 된 것이다. 사회주의의 정의는 평등이지만 시장경제의 정의는 자유다.
절에서 불공에 해당하는 것은 대학에서는 연구와 수업일 것이다. 경제에서 생산에 해당한다고 말해도 좋다. 자유와 결과적 평등은 택일 사항이다. 자유로운 사람은 남의 잿밥을 평등하게 챙기지 않겠다는 자존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서 그 대신 내 몫의 잿밥을 불우한 남에게도 나누어 주겠다는 사람이 많으면 그런 사회는 따뜻할 것이다.
정부 대 대학, 수도권 대학 대 지방 대학, 국공립 대학 대 사립 대학, 외국대학 대 국내대학, 재단 대 교수, 총장을 비롯한 보직 교수 대 평교수, 정규직 교수 대 시간강사, 교수 대 교직원, 고교 대 대학 등이 대학 사회가 가진 이해(利害)의 대립 구조다.
정부의 교육 간섭을 반대하고 대학의 자율을 요구하는 것은 자유를 위한 투쟁에 속한다. 대학의 자유 는 학문의 생산을 위한 필요 조건이며, 아무리 고무해도 지나칠 수가 없다. 그러나 국비 보조금의 증액 요구를 위시해서 대부분의 대립들은 평등 분배의 영역에 속한다고 본다.
결과적 평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대학 사회라고 해서 없기를 바라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순진하다. 그러나 평등 분배에 대한 정의의 요구가 도를 지나치게 강하고 날카롭다든지, 줄 것은 주고 받는 것은 받는 방식의 타협으로 해결하는 관행이 너무 결여되어 있다든지, 나아가서 자유로운 학문의 생산 보다 분배 평등 정의가 더 중시되는 것은 곤란하다.
잿밥 다툼의 가장 큰 해악은 그것이 불공을 망치기도 한다는 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