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학신문에서 연재하는 칼럼입니다.
당시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을 이리저리 헤엄쳐 지나가는 묘한 기분을 경험한 기억이 있다. “게시판에 왜 이렇게 많은 압정들이 있을까?”, “게시판에 왜 게시물이 하나도 없지?”, “이 넓은 교정에 왜 이렇게 작은 게시판을 세웠을까?” 등등의 의문들이었다.
칠판만한 크기의 게시판에 크기도 제 각각인 게시물이 시간을 넘긴 채 어지럽게 너덜거리는 우리나라 대학 게시판에 익숙한 나로서는 이같은 문화를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실 게시판 보다 더 놀라웠던 일은 게시물을 게시할 때 A4 크기 정도의 정해진 규격을 준수한다는 사실. 일정한 압정으로 게시물을 고정하고, 게시판 안에만 붙이고, 시간이 지나면 자진 철거하는 규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지키는 학생들의 뛰어난 의식문화. 그것은 놀라움을 넘어선 부러움이었다.
지금 우리나라 대학들을 둘러보면 교내 건물 곳곳에 엄청난 양의 게시물이 어지럽게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차기 학생회를 구성하는 투표가 진행되고 있는 선거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지러운 게시물 문화는 입학식을 갓 치른 신입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동아리들이 벌이는 ‘전쟁’ 때나 봄가을 열리는 축제 때는 절정을 이룬다.
‘표현의 자유’를 무시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이러한 어지러운 게시물 문화를 표현의 자유라는 명분아래서 그대로 둬도 좋을지, 지성인이라고 자처하는 대학인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산림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많은 종이를 낭비해도 되는지, 금방 칠한 깨끗한 벽면을 테이프 자국으로 '곰보딱지'를 만들어도 되는지, 페인트로 어지럽게 갈겨 쓴 플래카드를 원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상관 않고 가져다 걸어도 되는지 말이다.
경험적 관찰에 의할 때 대학의 게시물 문화가 이렇게 어지러워진 것은 기성 정치판의 영향이 컸다는 생각이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후보들이 난립하고, 그들 사이의 얼굴 알리기 ‘전쟁’이 벌어지면서 길거리 곳곳이 벽보로 얼룩지기 시작한 이후 대학가의 선거판도 그렇게 변해갔다. 그것이 도미노 현상을 일으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대학 게시물 문화가 어지러워진 것이다.
하지만 기성 정치판의 게시물 문화도 지난 선거 때부터 정리되기 시작했다. 벽보를 붙이는 위치가 정해지고, 그 모양과 수량이 통제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지러운 게시문화의 '원조'인 정치판에서조차 일고 있는 자정운동이 왜 대학가에서는 아직 나타나고 있지 않은걸까.
정보화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온라인으로도 얼마든지 효율적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광판과 같은 수단을 이용하면 실시간으로 다양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첨단 방법을 두고서 아직도 구태의연한 게시물 문화를 유지하는 것은 시대를 선도한다는 대학인의 체면을 구기는 일이다.
깔끔한 캠퍼스 환경은 보기에도 좋을 뿐 아니라 대학인들의 정신건강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 학교당국의 끊임없는 지도 및 학생단체의 선도적 역할과 학생들의 의식개혁이 어느 때 보다 절실히 요망된다.